베트남전쟁
베트남 전쟁은 1975년 11월 30일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 베트남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서다. 이 전쟁은 분단된 베트남 간 내전으로 냉전시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 진영이 대립하고 1964년 8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미국 등 외국군이 개입하면서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전선이 넓어졌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전과 베트남 인민군의 정규전쟁에 해당합니다. 1964년 8월 미국이 도쿄만 사건을 빌미로 개입해 국제전쟁으로 번졌고 1965년에는 미국·한국·호주가 지상군을 파견했습니다.
8년간의 전쟁 끝에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같은 해 3월 말에는 미군이 전원 철수합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고 북베트남이 통일되었으며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이 선언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미국에서 반전운동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폭격과 공습, 포격, 수색파괴 등 압도적인 군사력을 무기로 휘발유 폭탄과 같은 화학무기를 무차별 사용해 미국 군사개입의 합법성을 공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쟁에는 300만~500만 명의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쟁 정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이 전쟁을 베트남 전쟁 또는 대미항전이라고 부릅니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베트남전쟁이라고 불리는데, 프랑스와 베트남 간의 전쟁, 즉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도 불립니다. 한국에서는 베트남 전쟁, 월남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핵심 전투
1966년 8월 두코 전투가 이루어졌습니다.
짠빈박 전투는 1967년 1월 한국 해병대의 투망작전 기간 중 베트남전 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억하는 전투입니다. 편찬연구원과 국방부도 단순 항복 작전으로 은폐합니다.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 해병대가 포기한 대형 전술기지가 적으로 이관되고 연대 차원에서 시작된 작전이 연대로까지 번져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 전투다. 역설적이게도 군이 지금처럼 고도로 발달하지 않은 시점에서 주요 전술기지의 유효성을 다시 한번 입증합니다.
1967년 2월에는 짜빈동 전투, 67년 3월에는 오작교 작전이 있습니다.
오작교 작전은 도깨비 11중대 습격사건인데, 전투중 경계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전투입니다. 베트콩의 매복 공격으로 하쿠바 제28연대 11개 대대의 주요 전술 기지가 거의 파괴되었습니다.
다행히 경비 담당 대장이 잠들어서 베트콩은 쉽게 기지로 진입할 수 있었지만 많은 연대원들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오작교 작전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빈보 해전처럼 오작교 작전이 성공적으로 선전되면서 국방부에 묻혔지만 참전용사의 회고록으로 밝혀졌습니다.
이외에도 1968년 구정공세, 1972년 안케패스 전투, 1975년 십자성 작전이 있습니다.
십자성 작전중 십자군은 파월 사령부 군수지원부대이며 작전에 참여한 부대는 해군 상륙함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남베트남 주재 한국인과 대사관 관계자 구출 명령은 미군의 자유풍 작전과 관련이 있다.
베트남 국군사령부 철수 이후 LST 개풍호와 북한 선박이 배치됐고 한국인을 비롯한 일부 현지 난민이 이들과 함께 탈출하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인명피해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약 9년간 비전투부대를 포함하여 총 34만 6393명이 한국군에 배치되었습니다. 이 중 304,760명이 육군 군인이었습니다. 전쟁 중 약 5만 명의 군대 약 4만 명이 유지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 사망한 한국군 병사 중 순직, 국방, 자살, 실종자 등 5099명이 공식 확인되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실제로 포로였지만 전사자로 취급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중 전사자는 4663명으로 사망자 외에 부상자도 1만 명을 넘었습니다. 최명신 주베트남 한국군 제1사령관은 베트남 주둔 한국군 사망률이 전체 참전 병력의 1.4%이며 미군 사망률은 2.3%로 추정했습니다.
인명피해는 육군이 3859명, 사망 1.2% 정도, 해병대가 1240명, 사망 3.4%다. 육군은 비전투부대 비율이 높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청룡부대의 병력 손실률은 맹호, 백마사단, 미군보다 높습니다. 해병대가 중부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작전이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전쟁의 평가
현대 관점에서 볼 때 베트남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충분한 지정학적 역사적 연구 없이 이념 논리로 개입한 미국의 결정은 잘못된 것입니다. 미국은 북베트남이 중국과 프랑스에 경계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북베트남을 포용하는 것이 아니라 북베트남만 거부하고 있습니다. 또
한 북베트남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맹신하며 외교적 충돌보다는 군사적 해결을 지향합니다. 데이비드 헬버스톰의 최고의 인재는 베트남전 참전을 위해 미국 정부가 겪은 의사결정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베트남전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평가는 냉전체제의 대리전쟁이 일으킨 비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한국군을 비롯한 많은 베트남 국민과 미군 및 동맹국의 목숨을 앗아갔고 전쟁 후유증 부분이 완전히 남아 있습니다.
베트남 파병에 대한 평가도 국제정치사상 불합리한 장이었고, 특히 갈등이 만연했던 냉전시대에 있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텔레비전, 영화, 비디오 게임 그리고 문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수없이 다뤄졌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또한 베트남과 미국 음악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둘 다 반전 음악과 반공 혹은 친공 음악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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